Criticism





혼합과 연계(Mix and Match): 자연의 향기가 일상의 공간을 흐를 때

장동광(예술학, 서울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한전플라자갤러리 (2005. 10.14 - 23)



1. 형식과의 새로운 대화
서양화가 임태규와 섬유예술가 김선미가 한 자리에서 만났다. 이 두 사람은 부부이지만 작품을 통해 새로운 조형형식을 창출하려는 협업자로서 우리 앞에 섰다. 임태규의 회화작품을 원본으로 삼아 직물 혹은 철물가구에 전사되어 다시 공간 속에 놓이는 형식이다. 임태규의 회화작품과 그것이 변용체로서 직물작품이 한 공간에 병치되어 회화와 텍스타일이 혼연일체가 된 토탈 아트(Total Art)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조각회화와 조각이 임태규의 몫이라면 직물, 방석, 쿠션 등은 김선미의 손길로 만들어진 실용품들이다. 따라서 회화는 회화대로 그 원본성을 지닌 채 벽면에 걸려있게 되지만, 직물에 전이된 임태규의 회화작품들은 김선미에 의해 다시 재구성, 변형되어 새로운 오브제(Object)-적어도 전시장 안에서는-로 재창조되었다. 이는 임태규의 회화작품이 지닌 원작성이 하나의 실용직물로서 변환되어 새로운 가치를 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심미적 가치와 실용적 가치가 공존, 융합, 변태, 증식한 것으로서 새로운 미적 해석을 요구하고 있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러한 발상의 근거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추론해 보게 된다.

첫째는 예술을 사고하는 방식 자체가 종합적이면서도 일원론적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회화, 조각, 섬유예술, 텍스타일 디자인 등이 분화 혹은 분리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미성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통합적, 일원론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 두 작가의 합의된 관점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리적 측면에서 볼 때, 회화작품 역시 벽면에 걸려야 하는 공간 점유적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입체작품과 같이 3차원적이다. 만약, 회화 역시 공간점유적 3차원의 조형물이라는 견해에 이의가 없다면 조각, 공예, 텍스타일, 건축 등과 동일한 장르 특정적(genre-specific) 성격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회화작품이 이러한 존재론적 형식에 국한되지 않은 것은 회화작품의 표현내용이 지닌 조형적 문맥을 의미론적으로 파악하여야 한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회화는 2차원적 평면에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재현구조나 추상적 세계(기하학을 포함한)에 관한 일루전(Illusion)의 세계를 창조하는 ‘그려진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번 전시회는 그려진 형식(회화작품)과 원본의 변형된 형식(프린팅 된 직물이나 방석 등)이 빚어내는 이중주이자, 편곡의 아리아(Aria)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 내재한 선율은 대단히 협업적인 화음이 전제된 상호보완적인 것이며, 형식적으로는 매우 일탈적이다. 김선미의 서피스 디자인(Surface Design)적 조형감각이 임태규의 원작을 변형시킨다는 점에서 ‘회화의 또 다른 증식체(增殖體)’ 일 수 있지만, 임태규의 입장에서는 원작이 지닌 예술적 가치가 상업적 가치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순수로부터의 일탈’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실험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예술을 보는 관점의 측면에서 예술가들의 생산물들이 결국 인간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심미적으로 고양시킬 것이라는 일관된 믿음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주 작은 일상의 사물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영혼의 울림(esprit)을 담아야 한다면, 이것은 너무나 낭만적인 비평가의 희망에 불과한 것일까....

둘째는 이번 두 예술가의 실험적 시도는 평면 속으로 혹은 또 다른 감각적 접촉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인(press)과 표출(express)의 관계성에 관한 모색이라는 점이다. 임태규의 회화작품이 캔버스 위에 내적 심상(心象) 혹은 조형적 메시지를 프레스(press)했다면, 김선미는 이미 프레스된 형상을 토대로 자신의 디자인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후 직물의 가공방식을 통해 출력(output)한 것으로, 즉 원본의 형상을 다른 출력방식으로 익스프레스(express)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선미의 직물 역시 어떤 이미지(그것이 자신의 독창적인 구상이던, 아니면 어떤 합법적 경로를 통해 얻어진 ‘이미 그려진 것들(ready-made Images)’을 차용하던 간에)를 수공의 방식이 아니라 기계적 수단으로 프레스를 하고 있음 또한 간과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임태규의 회화작품이 작가의 손길에 의한 각인의 결과체로서 ‘시각적 감상의 숭고함’을 내재하고 있는 반면, 김선미의 직물들은 결과론적으로 실용적 공예품으로써 인간의 감각적 접촉을 이미 예정하고 제작되었다는 측면에서 ‘실용적 기능을 지닌 회화’ 내지는 ‘회화의 평면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회화의 예술적 가치가 실용적 가치로 전환되면서 일어나는 ‘미적가치의 혼란’에 관한 문제를 짚어 볼 수 있다. 여기서 미적가치란 임태규라는 작가가 가진 직업작가로서의 경력과 지명도, 작품에 관한 미학적 평가, 원작으로서의 유일무이성 등이 총체적으로 고려된 미술시장이라는 제도 속에서의 환금적 가치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미적가치가 김선미의 새로운 개입에 의해 직물에 전이되면서 실용적 가치 혹은 공간조형의 장식적 가치로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직물을 사용한 다양한 변형체들 (커튼, 공간장식물, 방석 등)은 회화작품의 미적가치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상업적, 환금적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일종의 증식체로서 판화와 같은 멀티플(multiple)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멀티플은 필연적으로 회화작품의 유일무이성과는 다른 기준에서 시장가격, 교환가치가 부여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종합할 때, 이번 임태규와 김선미의 협업 전시회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배태하고 있다. 임태규의 회화작품이 지닌 본원적 미적 가치가 김선미의 디자인으로 새롭게 재맥락화되면서 실용적 가치를 지닌 직물로 변용되었고, 이러한 결과체로서 작품들은 임태규나 김선미의 원본성을 분별할 수 없는 상태인, ‘제3의 예술적 혼성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셋째는 임태규와 김선미가 꿈꾸는 이 실험적 시도는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의 개별적 독립성보다는 공간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종합적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회화, 가구, 직물이 하나의 심미적 조형공간을 창출하는 인자(因子)들로서 상호 유기적 관계성을 맺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는 서로 다른 물리적, 존재론적 특성들이 혼성적으로 융합되면서 평면과 입체, 원본과 복제, 심미성과 실용성, 미적가치와 효용적 가치가 미분화적으로 공존하는 새로운 조형적 세계에 대한 희구에 다름 아닐 것이다. 또한 이 신세계는 포스트 모던 지평에서 회자되는 담론들과 공감의 호흡을 나누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회화, 섬유미술, 텍스타일 디자인 등과 같은 모더니즘적 관점에서의 장르 구분을 넘어서려는 전위적 몸짓이기도 하다.

2 자연의 속삭임이 일상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다
이번 전시회의 중심축을 이루게 될 직물의 원본이자 오리지널 원작들로서 임태규의 회화작품들은 대체로 자연에 관한 사유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임태규의 회화작품들에는 자연의 풍경, 나뭇가지, 식물, 꽃, 나뭇잎 등이 현실감 있게 등장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소재들을 캔버스 혹은 한지 위에 염료가 스며들듯이 배경으로 처리한 후에 자연재료를 그대로 심거나 장식용 구슬인 비즈(Beads) 등을 부착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발견된 오브제(Found object)나 비즈, 한지와 같은 재료를 혼합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즉물적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재료적 혼합이라는 특성과 함께 그의 작품은 대비적 관계성에 관한 모색이 주목을 요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은 나뭇가지나 나뭇잎을 배치한 화면 옆에 모호한 형상들이 유동하는 듯한 색면화를 병치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고 있다. 이것은 이전의 추상표현주의 회화와의 연관성을 엿보게 하는 즉흥적 필세와 분출하는 듯한 감성적 표현에서 벗어나 보다 사유적 태도로 전환된 작가의 변화적 국면을 읽어보게 한다. 마치 낙엽이 지는 가을나절이나 겨울의 스산한 풍경을 연상시키는 화면들에서는 시적 아취를 자아내는 어떤 기운들이 깃들어 있다. 동양화의 문인화를 보는 듯한 그의 화면들은 애잔하면서도 잔잔한 자연의 속삭임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마지막 남은 열매의 껍질이 위태롭게 걸려있는 풍경이나 바람에 쓸려 다니는 애벌레의 껍질을 연상시키는 그의 그림에서는 속절없이 흐르는 계절의 애상(哀想)이 속살처럼 다가선다. 임태규의 최근작들은 그래서인지 바람과 공기와 세월의 정서가 물결처럼 흐르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그림을 그린다기 보다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밤에 본 산하의 풍경을 담고 있는 그의 또 다른 그림에서는 화면 바탕에 숨은 듯이 그려진 필선들로 인해 수많은 풀잎들의 부딪힘이 소리로 느껴진다. 그 깊고 어두운 화면 속에 남아있는 작은 흰 여백은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流星)의 자취처럼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렇게 자연을 느끼면서 소리와 바람과 공기를 화면 속에 담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또 그러한 가운데 무엇을 그리려는 의도를 버린 채, 무심의 경지에서 자연의 깊은 울림에 귀 기울이고 서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의 화면 속에서는 이러한 나의 추론을 부추기듯이 늦가을의 스산한 정취 혹은 겨울의 처연한 풍경들이 수묵화의 정서를 머금은 채 한편의 시(詩)처럼 걸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비극적 정서를 동반하고 우리의 시선을 흔들지는 않는다. 다른 편의 화면에 자리한 화려하게 피어나는 듯한 꽃잎, 유동하는 물속의 부유하는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도상들에서 생명의 기운에 대한 어떤 희망의 징후를 엿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우리들에게 자연의 생명력 혹은 순환적 질서의 은유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마도 임태규가 바라보는 자연에 관한 깊은 애정의 시선에서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어쩌면 서울이라는 복잡다단한 도심에서 벗어나 물 맑고 수려한 자연이 살아있는 양평으로의 작업실 이전이 던져준 새로운 작업환경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제 자연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던 예술적 선율을 이제 김선미와의 협력 작업을 통해 일상의 공간으로 전이시키는 실험적 시도를 펼치려 하고 있다. 그의 화면 속에서 각인되어 있었던 나뭇가지가 공간으로 떨어져 나와 의자가 되고, 그가 포착한 자연의 생명력, 꽃의 속삭임은 직물로 옮겨져 공간을 장식하게 된다. 그가 그려내려는 자연에 관한 사유,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자연의 질서는 전시라는 형식을 통해 일상의 공간을 채색하려 하고 있다. 그의 순수예술로부터의 일탈적 시도가 김선미의 섬유미술의 방법론을 통한 재맥락화와 깊게 결합되면서 공간조형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을 이제 우리는 전시를 통해 목도(目睹)하게 된 것이다.

3 조형의 지평에 핀 혼성의 꽃들
사실 이러한 회화작품의 텍스타일 디자인으로의 변용적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텍스타일디자인협회 등에서 이미 유명화가나 섬유예술가들의 작품을 텍스타일 디자인제품으로 상품화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임태규와 김선미의 협력 작업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두 사람의 협업작업이 주객의 분리나 순수미술과 응용미술과 같은 개념적 한계를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이 전시의 핵심테제는 종합적 예술로서의 새로운 가능성 찾기이며, 심미성과 기능성을 하나의 선상에 두고 있는 즉, 공간조형이라는 총체적 관점의 제시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번 전시는 평면과 입체, 순수와 응용예술, 회화와 텍스타일 등이 하나로 융합된 상태에서 우리의 일상 공간이 어떻게 심미적 공간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가에 대한 실험적 시도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예술적 관점에 대한 새로운 시선교정이며, 예술가의 평면적 각인이 입체로, 텍스타일 디자인으로, 일상의 공간 속으로 전이되는 새로운 형식에의 탐구인 것이다. 이 제3의 예술적 혼성체를 우리는 어쩌면 위태롭게 바라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술이 우리 삶에서 의미를 부여받아 왔던 것은 현실의 지평에서 미지의 세계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이전에 꿈꾸지 못했던 것, 전위적인 실험, 기존의 형식으로부터의 일탈... 그러한 것들을 늘 위태롭게 바라보아왔음은 이미 미술사의 목차가 웅변으로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회화와 텍스타일이 만났을 때... 새로운 혼성의 꽃 하나가 우리 앞에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