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ism





자유로운 추상표현의 변화 -90년대 중반 임태규의 근작을 중심으로-

유재길 (미술평론가)
갤러리 원 (1997.3.18 ~ 3.27)



임태규의 조형언어는 추상표현이다. 형태는 그 근원조차 찾아보기 힘들며, 색채는 단색조로 통일되어 있다. 어둡고 밝음이 교차된 추상표현의 평면은 서정적 느낌의 깊이를 갖는 공간을 탄생시킨다. 겹겹이 쌓인 표면은 이미 평면에서 벗어난 공간감을 갖는 것이다. 서정적 공간 속에 자유로운 추상표현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반으로 이후 새로운 자아의 발견이 시작된다.

90년대 초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작업태도와 의식이라고 생각된다. 즉, 첫째는 한 곳에 머물거나 인습적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추상표현의 양식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둘째는 엄청난 작업량으로 무언가 형식적인 틀에 벗어나고자 하는 실천적 의식이었다. 이것 역시, 독자적 조형언어의 탐구 못지않은 중요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같은 작가의식은 오늘날 예술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적 과제가 아닌가한다. 작가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자기 자신의 의지표명이 필요하다. 작가 의식을 생각할 때, “자기가 하고싶은 것만을 하겠다”는 낭만주의자들의 외침을 임태규의 작업태도와 의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의 작업실을 방문하게 되면 모두들 그의 작업량에 놀라게 된다. 작품들은 사방 벽면과 천정, 심지어 바닥까지 겹겹이 쌓여 있다.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고자 수없이 그리고, 지우고 하는 반복적인 것까지 생각한다면 그 작업량은 사실 엄청난 것이다. 이 많은 작품 앞에서 작가에게 어떠한 작품이 가장 좋은 그림인가하고 물었을 때, 그는 서슴치않고 “그냥 자연스런 그림”이라고 말한다. 자연스런 그림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진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그리는 그림, 남의 흉내가 아닌 나만의 직관적 표현이 담긴 그림, 그리고 스스로를 편안하게 해주는 그림을 좋아 한다고 말하는데, 아마 무념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그림들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작가와 대담속에서 “내 그림은 나 자신이 그렸다기보다 그냥 형성되어진 것같다.”라는 말이 인상적이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그림, 그것이 바로 ‘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제작되고 있는 임태규의 힘있는 서정적 추상표현주의 회화가 아닌가한다. 이같은 추상표현의 자연스런 그림을 그리기전인 ’80년대 말 그는 자신의 프랑스 유학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 파리 에꼴 데 보자르를 다닐 때, 자신은 누구보다 열심히 작업을 하였고 완성도 높은 완벽한 구성의 추상화를 제작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어느정도 만족스러웠다고 말한다. 그러나 점차 이같은 꾸며진 그림들은 비록 완성도가 높고 화려한 느낌을 주나 결코 자기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부자연스런 그림은 작가자신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제작된 당시 작업은 결코 자연스럽게 그려진 것이 아니라 공식을 외우고 쓰는 주입식 방식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근작에 나타난 임태규의 회화적 특성으로는 바로 형식에서 탈피한 자연스런 추상표현을 이야기하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이론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온 몸과 마음으로 그리는 그림을 원하고 있다. 자연스런 그림은 인간의 의식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든다. 물감이 뿌려지고, 붓글씨의 획처럼 그어지는 선에서 무슨 의미를 찾는 것은 아니다. 좁은 여백과 어둡고 넓은 흔적, 여기서 작가는 서정적 공간을 탄생시키고 있다. 그의 추상표현 작업은 무형의 표현이며, 우연성을 빌어온 행위의 결과들이다. 행위의 반복은 우연성을 거부한다. 겉으로 들어난 것이 우연히 만들어진다고 하지만 그 우연은 수많은 반복의 결과이다. 그는 아무 생각없이 감각에 의존하면서 우연에 의한 자신의 흔적을 명확하게 남기고 있다.

또한 그의 근작은 모든 것을 지워나가고 있다. 지운다기보다 겹쳐서 그리고 또 그려나간다는 말이 더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그리다가 지우고, 또 다시 그리는 반복작업의 연속으로 화면에는 두터운 마티에르만 남기고 아무 것도 없는 백지 상태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어쩌다 사람들은 아무 것도 그려져 있지 않는 빈 화면 속에 미생물과 같은 부유하는 작은 형상들을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않는다. 현미경을 보듯 물감으로 뒤덮힌 화면 속에서 보물찾기하는 기분에 젖어든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관객의 호기심 만족이나 작가의 무절제한 자유로움만으로 작업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작가자신의 독자적 조형언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더욱이 그에게 있어서는 ‘90년대 초반에 제작된 양식화된 독자적 조형언어가 있었다. 즉, 코발트 안료를 사용한 청색의 투명함과 대담한 ‘ㅅ’ 자 형태의 등장, 그리고 붉은 색이나 초록색의 대비 등 서정성을 뛰어 넘는 힘있는 공간의 탄생으로 긴장감을 감돌게 하는 독특한 개성적 표현양식의 작품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같은 작품이 극히 짧은 기간동안 제작되었고, 더이상 지속시키지 못하였던 점이다. 한가지 양식에 집착하기 보다 다양한 표현을 추구하면서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것은 작가의 자유이나 독자적 조형언어를 갖지 못한 화가는 결국 자기를 찾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를 갖게된다. 앞으로 기대되는 것은 다양한 양식적 변화의 추구 속에서 독자적이며 개성적 조형언어를 우리 모두에게 인식시켜 주는 것이다. 임태규에게는 그러한 것을 구축할 힘이 있다. 그의 ‘90년대 초반 즉흥적 행위의 추상표현 연작들이나 이후 제작된 함축된 행위의 추상표현 작품에서 그 가능성을 더욱 커진다. 살아 움직이는 듯한 붓터치의 역동적 움직임, 그리고 온 몸으로 열정을 다하여 그려지는 그의 엄청난 작업량과 작품 하나하나에서도 우리는 그의 축적된 힘을 발견하고, 미래에 대한 힘있는 도전적 노력에 박수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