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iticism





자연 상태의 회화

서성록 (미술평론가)
문화일보갤러리 (1995. 7.18 - 7. 31)



영국의 미학자 토마스 먼로(Thomas Munro)는 동서미술의 차이에 대해 언급하면서 서양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기위해 많은 시간을 ‘작업 자체’에 할애하는데 비해, 동양 화가들은 작업을 ‘준비’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가 말하는 ‘준비’란 단순한 의미에서 화지를 깔고 벼루를 가는 등 번거로운 준비절차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음의 태세라 할까, 흰종이 앞에서 명상하는 행위를 중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양화가들은 마음태세와 명상을 중시하기 때문에, 정작 그림을 제작하는 기술적인 문제에는 소홀한 감이 없지않다. 자신의 그림에 얼마나 혼이 얼마나 불어넣을 수 있는지 문제삼을 뿐 겉을 다듬거나 꾸미는데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는다는 얘기다. 서양에서 그림의 리얼리티를 살려내는 쪽으로 발전해온 데 비해, 동양에서 뜻그림(寫意畵)이 유독 발전한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와같읕 맥락에서 임태규의 작업을 파악하면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본다. 그의 그림은 우리가 평소 생각해왔던 대로 ‘잘 그려진 그림’ 이라고 보기 어렶다. 행위의 누적 또는 프로쎄스를 강조했으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단단한 조형적 미듭’을 짓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보기에 따라서는 미완 또는 ‘한풀이’ 그림같이 여길 수도 있를 법하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바로 이점이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믿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작업 자체가 어떤 분명한 대상을 염두에 두고 그려진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혼을 쏟아넣은 것이엇 도대체 뭘 그렸는지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물음은 자연스럽게 어떻게 자신의 혼을 표상하고 있는지에 관한 문제로 넘어가게 된다. 임태규는 ‘자연스러움’을 무척 중시하는 경향을 띤다. 바꾸어 말해, 어떤 꾸밈이나 군더더기를 개입시키는 것을 거부한다. 얼핏 보기에는 붓을 꾹 눌러 단숨에 끝낸 그림처럼 생각될 정도다. 군데군데 물감 찌꺼기, 자국같은 것이 남아 있으나 애써 감추려는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지저분하면 지저분한 대로, 깨끗하면 깨끗한 대로 내버려두는 식이다. 천에 물감무늬가 자연스럽게 번져기도록 허용하고바른 속도로 가해진 갈필, 그리고 그 위에 다시 덧붙혀진 선이 화면 전체에 넘실거리며 요동하게 내버려 둔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바로 그 상태’에 충실하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의 추구는, 그림을 자신의 의지안에 억지로 맞추어 가두는 식이 아니라 자유롭게 풀어헤쳐 놓아주는 방식으로 체현된다. 이같은 방식은 그의 독특한 화면 경영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작가는 검정, 진청, 하늘, 초록 등 그가 즐겨쓰는 물감을 고른 뒤 평면에 펼쳐 놓는데 이때 작의성이 개입되는 것을 가급적 억제한다. 가령 노끈으로 만든 다발로 물감을 잔뜩 뭍혀 칠한다거나, 바탕에 물감을 올린 다음 있는 그대로 방치해 응고시킨다든지, 튜브에 든 물감을 캔버스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리저리 뿌리는 방법 따위가 그러한다. 자연스러움을 소중히 여기는 그에게 있어 ‘목적성’은 전혀 걸맞지 않는 개념이다. 애당초 부터 의도와 인위성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그때 그때의 기분에 충실하게 그림을 진행시켜갈 따름이다. 그때그때의 기분이란 흔히 일컫듯 ‘우연’이라 이해해도 좋겠지만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자연상태’ 또는 ‘자연성’이라는 개념이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작가는 규격화된 선이나 정형 또는 체계의 구속을 벗어나 자연상태의 회화를 빚어내고자 한다. 그러한 징후는 그림제작과정을 살펴볼 때 충분히 감지될 수 있으리라 본다. 작가는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을 바닥에 뉘어 제작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런 다음 그 위에 물을 흔건히 쏟아붇기도 하고 틀 자체를 아래위로 또는 옆으로 흔들어 우발적인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또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판단이 들 경우 그 위에 스프레이를 뿌리기도 한다. 자연성의 전형적인 예를 한가지 더 든다면 그것은 위에서 설면한 방식의 결과로 생성된 화면에다 다른 천을 덮어 마치 탁본을 찍듯이 밑그림을 고스란히 옮겨내는 방식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천에다 구정물을 흘리고 그것이 마르기 전에 재빨리 덮어 찍어내야 하는 신속성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자신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그림을 제작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린 상태에서만 비로소 가능한 자연상태, 그것이야말로 임태규가 소망하는 최고의 미적 단계인 셈이다. 이면 그의 그림이란 세월유수 (歲月流水)란 말처럼, 흐르른 시간에 맡겨진 그림, 아무런 인공의 강제 없이도 엄연히 존재하는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나 싶다.

임태규가 이처럼 자연성을 끔찍히 섬기고 있는 까닭은 과연 어떤 이유에서일까? 단견임을 전제로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구속으로의 탈피, 즉 마음의 자유를 얻기 위함인 것처럼 생각된다. 물론 마음의 자유는 저절로 오는게 아니다. 장학(莊學)의 표현을 잠시 빌리면 “마음을 맑게 하는것” 즉 허정지심(虛靜之心)없이는 가능치 않다. 그런 허정지심의 세계란 허정한 마음가짐으로 사물을 관조하거나 온갖 지식이나 인위적인 영역으로부터 초탈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다. 따라서 마음을 맑게 하는 것, 임태규에게 있어선 그것을 ‘자연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자연성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과 일체를 이루어 자유 해방을 얻고자 함이 그의 그림의 요지라 볼 수 있다. 그의 자연성은 결코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불교의 ‘해탈’, 도교의 ‘무위자연’, 노장철학에서 말하는 ‘무아’와 같은 성질의 것으로 분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그와같이 오래된 정신적 또는 종교적 가치를 예술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것이 특징으로 인식될 뿐이다. 아무리 세월이 변한다 해도 움직일 수 없는 것, 그것은 유구한 세월을 거쳐오면서도 변함없이 우리의 의식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정신적 또는 종교적 가치임을 일깨워주고 있는 셈이며, 그러한 전통을 확인시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시키면서 우리의 삶과 도저히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으로 밀착시키고 있음을 임태규의 작업은 놀랍게도 실증해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