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결 - 닫혀진 세계에서 열려진 세계로

미술평론가 金 仁 煥



愼文鏞은 잔잔하게 파동 치는 물결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물결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알만큼 묘사적이나 바다에 면한 木浦가 그의 생활터전이며 思索의 본거지라는 데서 그것을 主題로 택했을까. 그가 주시한 水面의 표정은 다양하면서도 일정하고 實體的인 것 같으면서 추상적이기도 하다. 때로는 大氣의 변화에 따라 격앙된 표정을 짓기도 할 바다의 지극히 유연한 얼굴을 그는 그린다.
바다나 강의 물결을 바라보면 마음의 沈靜과 淨化를 얻을 수 있다고들 말 한다. 사실 그렇다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득한 太古를 간직한 듯한 바다는 바라볼수록 신비스럽고 우리의 의식 內面을 투과하고 침투해 들어오는 어떤 힘을 지닌 듯싶다. 그默示的인 형상이 형상화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방향을 달리하는 여러 각도에서의 反射 光이 실제로 물결의 실체를 이룬다. 그러니까 작가는 빛을 그리고 있는 셈이라할까. 나타났다가 부서지며 그 존재의 物性조차 촉감으로나 감지할 수 있는 물결의 세계는 적막한 觀照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인위적인 꾸밈이 없을뿐더러 時空을 초월한 다채로운 자연 현상의 찰나를 감응케 하는 彈力이 있다. 그 廣大無邊함 은 지상에 있는 어떤 것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닫혀진 세계에서 열려진 세계에로의 전환에 대한 의지를 우리는 바다에서 배우려한다.
이 특수한 일관적인 테마위에 시각적인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작가는 바둑판모양의 눈금 혹은 틀 모양을 중첩 시키고 있다. 또 色面의 균등한 변화를 주어 빛의 변화에 의한 바이브레이션을 강조하기도 한다. 유기적인 자연 주제와 기하학 형상의 극명한 대비 관계로서 화면의 단조로움이 상쇄되고 생동감있는 리듬효과를 얻을수 있다.
6O년대 말에 등단한 작가는 특히 70년대 현대미술 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첨예한 활동을 보여 왔다. 이 7O년대의 현대미술운동을 통하여 두드러진 성과로서 나타난 것은 주지하다시피 미니멀한 발상이 주가 되는 절제된 추상회화였다. 작가가 그의 작품 속에 물결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시작한 것은 최근에 와서부터이다. 그러므로 脫이미지라는 70년대를 풍미한 현대 미술운동의 미니멀한 경향에서 이완되어 또 다른 작품 세계를 모색하고 있음이 최근의 작업 경향이라 할까. (에포크) 그룹에 가입하면서 그는 光州지역의 현대미술운동에 공헌하고도 있다.









Untitled. oil on canvas. 60 x 50cm. 1984













Untitled. oil on canvas. 570 x 130cm. 1988

愼文鏞의 바다에 관해서

유준상 (미술평론가)



회화인 평면의 구성은 관례적인 구성원리로서는 게스탈트적인 정태(靜態)로 받아드려졌고 이것이 서양미술을 하나의 체계로서 존립하게 했었다. 그것은 공시적균형(共時的均衡)의 변환체계도 설명 될수 있다. 종교화의 경우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구성이 이것의 예이며 화면에 등장하는 세가지 요소가 여기서의 질서체계이긴 하지만, 그것은 묘사된 인물들의 사회적 위계에 근거를 두는 것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종교화라고 부른다. 코레치오-카라바치오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묘사를 보다 회화적으로 표현한다는 본래의 욕구 때문에 명암의 표현 기법을 개발 했던 것이며, 회화표현에 있어서의 빛의 중요성에 관해 시사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이 명암(明暗)의 수법을 회화 고유의 원리적 공간형태로서의 자율적 영역으로 이해되기 시작 하며, 표현된 내용의 역사적, 인물적 그리고 종교적인 위계는 점차로 실추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풍경화가 회화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등장하게 되며, 오늘날 말해지고 있는 빛과 색 그리고 형태 등이 시작 체험을 구성하는 삼대요소로서 받아 드려지게 된다. 따라서 자연은 그것으로서의 소재로부터 추상(抽象)된 회화고유의 원리적 공간형태로서의 자율성(自律性)을 띠우게 되며, 오스카 와일드의 역설적인 표현처럼 자연은 예술을 모방 한다는 게 된다.

여기서의 모방은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유형(類型)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바꿔 말해서 모방의 대상 또는 규범으로서의 사회적 유형이 미리 전제되고 다음으로 미술가가 이것을 본 뜬다는 그리스적인 이성(理性)의 한계를 염두에 두면서 와일드는 말한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피카소는 9O평생에 십만점 이상의 작품을 생산했고 어떤 화가보다도 열심히 그림을 그린 화가이지만 생전에 그가 제일로 두려워했던 건 자기 자신을 모방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피카소가 피카소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변모로서의 새로운 피카소의 개발이 필요 했던 거며, 그는 이처럼 긴장된 자의식의 지속을 통해 늘 자신을 실험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결과로서의 작품을 가리켜 우리는 피카소의 표지를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여기에 예술가의 개별성(個別性)의 한계와 일회성(一回性)으로서의 표지(標識)의 문제가 제기된다고 하겠다. 빛의 예술가 가운데서도 인상파의 모네가 루앙의 카테드랄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햇빛의 반사를 추적하여 같은 모티브로 연작 했다는 건 이것의 예이며, 근대적인 뜻에서의 예술가태세(藝術家態勢)의 모범적인 예였다고 하겠다. 그는 빛을 매개로 느껴지는 물질적대상(物質的對象)에관한 감각자료를 개인(個人)의 시각에서 충실하게 추적했던 화가였으며, 사물의 고유색과 빛(光)이라는 위계의 작용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색(色)의 관계를 증명 하려는 화가였던 셈이다.

愼文鏞의 미술은 빛에 의해서 생기는 변화를 증명한다는 입장에선 전기한 인상파 화가들과 같은 의미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인상파가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찰라적인 인상에 마음이 끌렸고 그것을 찰라적으로 포착하려는 입장에선 그렇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인상파의 풍경화는 어디까지나 찰라적인 순간으로서의 풍경인 것이었으며, l7세기의 풍경화하고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가령 터너의 바다는 무겁게 가라앉는 잿빛의 수평선은 아니었으며, 태양이라던가 빛의 진동으로 살아 움직이는 바다인 것이었다. 그것은 순간적인 자연의 양상이었으며, 태양이라던가 빛의 진동으로 살아 움직이는 바다인 것이었다. 그것은 순간적인 자연의 양상이었으며, 모든 것을 반영(反映)하는 것으로서의 유동적(流動的)인 원소(无素)라고나 할 대상들이야말로 이들의 관심을 유발 시켰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시각(視覺)은 세로운 묘법(描法)을 필요로 했던 것이며, 화가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知識)으로서의 형태(形態)가 아니라, 감각적으로 사물의 포름을 변화시키는 빛의 움직임과 더불어 자신의 눈에 비친 데로의 영상(映像)을 나타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愼丈鏞의 바다는 이러한 뉴앙스를 매우높은 레벨로서의 추상(抽象)으로 압축한 세계라고 하겠다. 그의 바다는 어디까지나 수평(水乎)의 호라이존으로 전개되며 긴장과 저항을 연상 시키는 단 한 가닥의 수직(垂直)도 철저하게 배제(排除)된다. 그의 바다는 노도질풍은 아니며 바다를 구성하는 제어단위(制御單位)로서의 작은 파장들을 하나의 커다란 구비침으로 삼켜버리는 큰 파장으로 강제(强制)되거나 연역(演釋) 되는 법이 결코 없다. 이러한 묘사(描寫)는 화가의 참을성이라던가 인내력의 한계로 설명될 수도 있겠으나, 하나의 화면이 구성(構成)되 는 최저단위의 보존(保存)을 위한 불가피한 배려 때문으로 보여 질 수도 있다. 즉 바다라는 전체상은 무수한 물결들로 구성된다고 할 때, 愼丈鏞의 물결은 그 하나하나의 자기제어(自己 制御)가 전체(全體)를 구성하는 보존(保存)의 단위로서만 작용하고 있다는거며, 인상파가 찰라 적인 순간을 포착해 보려는 요구로부터 시도되었던 연작 (聯作)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을 주는 내용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싶다.

바다는 늘 해맑은 푸르름으로 누워있는 대상은 아니나 때로 노도질풍의 격렬하고 사나운 전체상을 보이기도 한다. 愼文鏞의 현재의 디렘머는 이러한 변환(變換)을 어떻게 희화적(繪畵的)으로 유발(誘發) 시키느냐에 있다고 하겠다. 남해바다기 일망대해로 전개되는 목포에서 교수로 있는 愼文鏞은 늘 바다를 관찰해 왔으며, 이 태고의 시원이자 추상보편(抽象普遍)의 전체상(全體像)으로 부터 구조 (構造)의 원리를 추구해 왔다. 그것은 불변(不變)에 대한 갈망이었는지도 모르며 노도질풍의 격변다음에 인류가 반듯이 되돌아오게 되는 짙푸른 수평으로서의 안정 (安定)에의 희구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愼文鏞은 그의 이러한 의식(意識)의 흐름을 발생학적인식의 기원으로 소급하여 감각운동(感覺運動)의 스키마(Schema)로부터 세계인식의 경과를 추적한다는 건지도 모른다. 손에 쥔 나이프 같은 도구를 수평방향으로 짧게 긋는 동작의 되풀이, 일정한 부피로 미리 착색한 소지(素地)의 살갗이 이 일회성(-回性)의 동작으로 드려나게 되며, 수없이 되풀이되며 반복되는 동안 소지는, 칠흑(漆黑)이 동녘이 트이면서 점차적으로 그 음양(陰陽)을 드러내어 여명(黎明)의 모습을 띠우게 되듯이, 그의 캔버스는 하나의 전체상으로 구성되어 나간다. 하지만 이 일과성의 흔적이 늘 일정한 파장으로 강요될 때, 전체상으로서의 바다는 단일관념(單一觀念)으로서의 형식구조로 지금의 우리의 공동관심사이다.
왜냐하면 그 바다는 우리가 함께 타고 출항해야 될 수평선 이기에 ..........................







신문용의 파도그림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

원동석 (미술평론가)



우리는 자연의 이미지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산과 바다이다. 동양화는 이 점에 산과 물이라는 연계적 이미지를 통하여 무한한 자연을 표현하는 독특한 장르를 형성한 것은 잘 아는 일이다. 삶의 터전을 제공하는 자연의 가장 높은 것이 산이라면 자연의 가장 넓고 깊은 것이 바다이다. 우리의 자연정서가 산과 바다라는 두 축을 근간으로 삼고 있음에도 대체로 산에 관한 이미지의 예술화가 풍부함에 비하여 바다에 관한 그것은 빈약한 편이다.
왜 그러한가? 농경 중심적 풍토와 역사성 때문이라고 본다.
순수한 바다의 이미지는 무엇인가? 인간은 수중동물이 아니므로 망망한 바다에서 살 수 없다. 따라서 육지와 연관된 시각에서 바다를 바라 볼 뿐이다.

태초에 생물이 바다로부터 태어나고 땅으로 올라와서 고등생물을 보게 되었다는 일련의 진화과정은 바다를 통한 생명의 연원을 깊이 사유하게 한다. 바다는 하늘과 마찬가지로 무한한 명상의 터밭이다. 하늘과 맞닿는 바다의 수평적전개가일상적 모든 잡념을 씻어내는 명상의 순수한 시간으로 되돌아가게하며 하염없는 생각의 출렁거림으로 자기를 잊는 망아의 경지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 바다이다. 물론 산에 올라가서도 이 같은 명상을 누릴수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산을 좋아하는 기질과 바다를 좋아하는 기질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나는 내 출생과 성장과정 탓인지 항상 바다 쪽이다.

아무래도 산위에서의 명상은 산이 갖는 유한한 생김새로 인한 턱 걸림의 장애가 많은데 비하여 바다에서는 무한히 자유롭고 유연한 생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어 더욱 나는 선호한다. 더구나 거칠게 몰아치는 성난 파도이든 잔잔한 파도이든 바다의 움직임은 하염없는 생각의 출렁거림과 감정의 높 낮은 이랑을 선사한다. 어쨌든 바다는 내 유년시절의 그리움으로부터 말 년에 돌아가 쉬고 싶은 선망의 이미지로서 시발과 종착이라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으며 내 삶의 수평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바다를 소재로 그린 그림을 보면 우선 반갑고 흥미를 끌게 한다. 내가 아는 바다그림 중에도 제주도에서 사시는 변시지 화백이 그린 가장 제주도적 바다그림을 가감 없이 정서적으로 좋아한다. 그 좋아함은 내 평론적 입장과 별개의 차원에서의 유년의 추억과고독한 명상의 바다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 그림의 단순하고 순수한 명상성은 바다 생활인의 구체적 정서가 결여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가 무한의 한 실줄에 불과함을 자각한다면 보편적 사유를 낳게 하는 바다의존재를 부인할 수 없게 한다.

신문용씨도 바다그림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육지의 시각에서 본 바다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점에서 독특하며 추상적이다. 그의 바다는 어느 장소적 구체성에 매이지 않는 바다의 전체이기도 하며 동시에 한 부분이기도 하나 그는 바다가 움직이는 표면적 현상 으로서 파도에 주목하고 있다. 파도는 바다의 얼굴이며 표정이다. 우리는 얼굴의 표정을 통하여 내면적 심리와 행동을 읽는다. 그렇다면 이 작가는 파도를 통하여 바다의 무엇을 읽으면서 보여 주려고 하는가? 감상자는 이러한 물음을 품으면서 상상할 것이다. 수년전부터 신문용씨는 자신의 파도그림에 일관된 작업을 견지하여 왔으며 얼핏 보면 단조로울 정도로 하나의 스타일과 기법으로써 지속하고 있는 셈이나 하나의 화폭에 주조색을 밑그림 칠한 다음에 나이프를 가지고 반복적인 율동의 손동작을 통하여 물이랑이 하나씩 태어나게 한다. 그리고 간간히 채색의 명암을 가하여 높고 낮은 파도의 실재감을 살려낸다. 햇빛의 반사에 의한 멀고 가까운 파도 빛깔의 미묘한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그 바다는 추상적이면서 구상성을 드러내는 이중성을 보여 준다.

여기서 그의 그림의 이중적 의미는 파도에 대한 대상으로서 이미지의 의미와 그것을 만들어내는 기법과정으로서의 의미이다. 이미지의 전달수준으로써 기법이 아닌 그린다는 행위 자체를 강조하는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손동작의 놀림을 보여줌으로써 일단의 행위미술 내지 미니멀리즘과 상통하는 맥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모더니즘 계열의 에포크 회원으로 오래 활동하였던 사실은 이의 측면을 말해준다. 동시에 그의 파도는 구상적이면서 추상적인 모습을 지님으로써 감상자의 자유로운 상상에 내맡기고 있으며 그것은 순수한 명상을 유도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그의 그림 자체가 명상을 지시하고 내용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원인 제공을 하는 상징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다의적인 측면의 함의가 그의 파도그림이 갖는 단순함속에 숨은 묘미라고 보여 진다.

작가 자신은 자기 그림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하여 줄금을 긋는다거나, 면 분할을 시도하기도하고 창틀 끼우기도 하는 실험 작업을 해왔으며 근래 와서는 불규칙적 파도에 주력하면서 격랑이 이는 파도에 자신의 감정을 싣고자 하는 주관적 표현세계를 모색하고 있는 것 같다. 어느덧 인기 작가로서 대중성을 획득한 그의 작품 세계가 그의 연륜과 더불어 익어가는 인식의 변화라고 보여진다.









Untitled. oil on canvas. 194 x 130cm. 1989






긴 이야기를 듣는다

玄山丈化財團理事長 李 永 權



아무리 작은 작품 앞에서도 넓고, 깊고, 멀고, 높고, 낮음의 긴 이야길 생각케 하는 것이 愼文鏞의 作品이리라. 어느 날이던가 만공선사법혼(滿空禪師法訓)을 접 한 적이 있었는데 그 글귀가 愼文鏞의 作業世界에서 마주함은 어떤 연관이 있기 때문일까.
“나“ 그것은 진정 자유로워야함에도 마음대로 되는게 있었으며 또한 마음대로 할일 무엇이던가, 任意에 출발과 끝이 어디서 어디까지인가.
忘我가 주인 되고 眞我가 종이 되어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 할 것도 없고, 생사도 없고, 불에 타거나, 물에 젖거나, 칼에 상함이 아니라 어떠한 억매임에서 벗어날 때 진정 "내“를 마주하는 내일에의 작업일 것이리라.
인간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 있다면 내일도 살아야 할 삶을 위한 이 땅에서의 행위, 그리고 그것이 가능성에의 도전일 것이다. 그것은 날로 새로운 것에 탐구로 한 진리 쪽이겠지만진정 理性의 대비(對此)로한 새章의 삶의 美學, 바로 學閒의 尖端의 자리일 것이다. 그리하기에 그 작업 또한 본성으로 한 순수함과 진실로 원초적인 생명력의 열도가 표현하는 삶의 그 자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나로하는 대비, 무한한 업세(業世)를 고집하며 한때의 갈증이나 아픔이 따르더라도 나아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지만 굳이 나의 표현과 나의 것이란 행위가 성의로 맺을 때 여기 삶의 美學이 당신으로 하여 이루어짐을.............
우리 또한 아는 척 고개 끄덕 할 것이리라. 그리고 열심히 사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길어 질 것이리라. 愼丈鏞의 84중기 이전의 作品에선 우리를 걱정하고 자기 작업에 대한 어려움과 몰이해를 미리 詩語에 註를 달듯이 자꾸 손질하던 설명이 따르더니(?) 오늘의 그 앞엔 이미 열어놓은 넓은門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쫓기는듯하며 어느 한쪽을 아쉬워하던 지난날에서 지금의 성숙된 스스로의 대비로 한 달관된 괘적위 작품은 오히려 돌아오는 귀로의 긴 이야길 들려주고 있는것이 아닐지. 일찍이 김인환, 이일, 유준상님들의 서문들을 기억 하지만 따로 영역 밖의 한자리 욕심함은 바로 그 앞에 서 있는 나의 대비로, 벗고 싶은 허물을 보기 때문일 것이리라.

이자리
아직은 보람도 채우지 못한 招待의 자리오나 여러분의 보살핌을 담하는 마음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저희나 愼文鏞 교수에겐 따로 가족을 노함이 없듯이 내일로 한 삶에 가능성을 표현하는 美學을 추구하는 동행을 바램하는 한자리로, 우리 이어갈 힘이 될 것입니다. 부디 이 좁고 짧은 시간에 당신이 주실 긴 이야길 간직케하여 주십시오. 아울러 새해에도 더욱 강건하시길 合掌드리옵니다.









Untitled. oil on canvas. 116.7 x 91cm. 1991






愼女鏞 敎授의 작품을 보면서

木浦大學 敎授 許慶會



愼文鏞 敎授는 늘, 바다에서 그의 아름다운 꿈을 찾으려고 한다.
그는 조그마한 화폭 속에서도 가없는 바다의 광활함을 보여주면서, 한없이 깊은 바다의 가슴을 보이게 한다. 波濩는 뜻 그대로, 물의 살결 곧 바다의 몸이며, 물의 永遠한 生命을 의미하는 말이다. 바다는 물결이 있기에 끊임없는 삶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주 머언 옛날에 하늘이 파아란 빛으로 열릴 때, 바다도 그 모습 닮고자 파랗게 되었나 보다 하늘을 우러러 노래할 때, 그 흥겨움이 물결을 낳았을 것이다.
鳴昞波聲과人魚의 자태가 비쳐오는 파도에서 눈을 뜨지 않고 있으면서 장엄한 바다의 숨소리를 듣는 것 같다.
세 부면이 한 폭으로 된 작품을 보고 나름대로 꿈같은 생각을 펼쳐 본다. 짓푸른 바다에서 神話의 揷話들을 줍고 있으면, 바다의 물결들은 금방 創世의 山脈들로 바뀌고, 十字로交友된 船土에선 神秘스런 想念이 나래를 편다. 맨 위에 색다르게 나타난 바다는 산도 아닌 하늘로 보이면서 물결들은 그냥 구름으로 떠가고 있다. 바둑판모양의 눈금속에서는 不調和를 깨뜨리며 듯한 바다가 怒淳를 달래며 不調和 슥의 調和에 매듭을 짓는다.
바다위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듯한 창틀 같은 것들은 視點들을 달리하면서 다가오는바다, 가까이서 멀어져가는 바다를, 그리고 창틀안의 바다는 太古의 전설을 담은 童話가 밤을세울것 같은 바다를 부각시킨다. 규칙적으로 교차된 선들은 治洽한 물결들을 순간적으로 뚝 멈추게 하는 것 같더니 다시금 그 물결들은 그대로 선의 벽을 깨뜨리며 거침없이 일렁이며 어디론가 흐르고 있다.
綠水波瀾은 가늘고 굵은 선으로 調和를 이루면서 批評者가 아닌 순수한 鑑萱者의 눈길을 모은다. 바다와 물결의 貫相 안에 投影된 作家의 의도는 玄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6O년대 후반에 등단한 작가는 그 동안 외롭게 이 길을 걸어오면서 바다라는 대자연의품속에서 물결과 함께 深呼吸을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바다와 물결을 素材로 택하는 愼敎授의 앞날에는 반드시 바다를 닮은 넓고 깊은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主題를 그의 작품 안에 담을 때 所期의 作品이 나올 것으로 안다. 門外漢이 털어놓은 辭說 속에는 억측과 비약이 있을법, 그렇기에 잘 다듬어진 작품들에 무단히 손때를 묻힐까봐 이만 적으면서 愼敎授의 앞날에 빛이 있기를 祈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