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셀시 기획 정명화초대전이 4월 13일(화) ~ 22일(토)까지 전시가 열렸다.
삶의 고단함을 설치와 회화로 선뵀던 정명화 작가의 전시명제들을 보자면 '나비의 꿈', '나무에서 바다 그리고 섬', '피고지는', '나무에서 바람', '바라고 또 바라고'
등이다. 최첨단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전한 갈증의 진원은 인간애의 부재일거란 생각을 한다. 전시기간 내내 여자로, 인간으로 스스로를 돌아봤던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치열한 삶속에서 그녀의 가장 큰 고민이란 멀리 있지 않았다. 또 하나의 그녀, 그녀들이 삶을 채우고, 그려간다. 정명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들어본다.
1. 이번 전시는 어떤 성격의 전시인가요? 이전의 전시와는 어떤 다른 의미를 갖나요?
이번 전시는 현재의 제 삶의 모습이 가감 없이 그대로 담겨있는 작품들이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전 전시도 마찬가지지만 특별히 이번 전시는
그 폭과 깊이가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전까지의 저는 대상을 관찰할 때 어떤 해석을 덧붙이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저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다거나, 제 정서에 바탕을 두고 설명되는 대상을 선호했다는 뜻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던 대자연의 풍경과 수많은 인물들, 그리고
일상 구석구석에 놓인 정물들 중에 이런 의미와 정서를 느끼는 대상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 이전 작업의 특징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제 작품의 폭과 깊이는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통하여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세상의 이치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세상의 이치는 이것이다’는 단정이 아닌 ‘삶의 과정’으로서의 ‘고통’이 전제된 전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즈음의 제 삶이야말로
도저히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이 이토록 뒤죽박죽 엉망이라면 그림 역시 뒤죽박죽 엉망인 게
옳은 것이 아닌가. 이런 삶의 한 가운데에 서 있으면서 내가 그린 그림만이 홀로 그럴듯한 의미와 그럴 듯한 설명을 달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저는 지금까지 미술사적 이론과 개념의 틀 안에서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려 한 것은 아닐까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사적 의미를 넘어 제 삶이 진실 되게 반영되고 드러나는, 그리하여 그림 안에서 제 삶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번 전시는 나의 그림이 ‘현재 내 삶의 모습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크게 반영하는 전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이번 전시의 제목은 ‘나비의 꿈’인데요.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작가님 작품의 제목과 관련하여 설명 부탁드립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40대 초반이 되어 있는데, 희망적이라기보다는 절망적이고 어두운 삶 속에 제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제
삶을 예쁘게 가꾸면서 살아 왔는데 왜 밝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있는가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의 삶이 어두운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변의 누군가에 의해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변인의 삶에 영향을 크게 받으며 살아왔던 나의 삶은 참으로 덧없는 것이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주변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비처럼 자유로이 날고 싶었습니다. 내 안에 숨죽이고 있는 나비는 지금 황량한 겨울을 보내고 있지만, 어느 날
봄이 오면 훨훨 날수 있겠지……. 내 안의 나비는 지금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있지만 이것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자유롭게 날 수 있으리라 꿈꾸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의미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이번 전시에서 회화작품 뿐만 아니라 설치작품도 중요하게 전시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설치 작품은 독립적인 작품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설치작품 ‘나비의 꿈: 피고지고 피고지는’은 화가로서의 꿈을 아직 이루지 못한 친구의 이야기로 ‘친구의 꿈’과 제가 공동 작업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화가를 꿈꾸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는 결혼을 해서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림을 그릴 것이라 생각하며 대학시절 사용하던 캔버스나
유화물감 따위의 미술재료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로부터 이 미술재료들을 가져갈 수 있겠느냐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게
된 친구 집에는 캔버스와 화구가 여전히 방 한 칸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화구에 적힌 대학시절 친구의 학번과 이름, 캔버스 천을 씌웠다 땠다 했던 타카
자국들을 보면서 여전히 그의 집 한 칸을 차지하고 있던 친구의 꿈이 정리되는 것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순간, 저는 그가 꿈꾸던 화가의 꿈을 어떤
식으로든 현실화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화가의 꿈을 꾸던 친구의 수많은 고민이 녹아 있는 바로 그 캔버스 액자 틀에 색칠을 하고 이를 설치하여 작품화 한 것입니다. 이 작품이 ‘친구의 꿈’과
제가 공동 작업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4. 이번 전시에서 만나게 되는 몇몇 회화작품 안에는 동그라미나 사각형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전시 제목인 ‘나비의 꿈: 피고지고 피고지는’ 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동그라미와 사각형은 아직 피지 않은 꿈 일수도 있고, 이미 져버린 꿈 일수도 있다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특히, 동그라미는 실현하고 싶은 희망과 이상의 표현일
수도 있고, 다른 한편 실현 가능성이 적거나 전혀 없는 헛된 기대와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5. 모든 작품이 중요하겠지만, 이번 전시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선택해주신다면 어떤 작품일까요? 대표 작품에 대한 설명도 부탁드립니다.
나비의 꿈 No.3 (회색고양이가 있는 바다풍경)과 바라고 또 바라고 No.3 (파란색 항아리)입니다. 바다와 하늘이 공존하는 공간을 푸른빛 원들이 두둥실 화면
위를 떠다닙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핑크 소파도 있고, 파란색 티팟 세트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고양이도 있습니다. 화면안의 모든 대상들은
어찌 보면 제가 무심하게 바라보는 대상들입니다.
무언가를 열망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 열망이 부질없다는 것을 동시에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열망하는 대상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지만 그 나열이 부질없다는 것을
원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푸른색 원들은 갈망이면서 동시에 사라짐을 나타냅니다.
6.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이 꼭 이것만은 생각하고 느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있을까요?
저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채울 수도 비울 수도 없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관람객들도 전시된 작품을 보면서 채울 수도 비울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라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7.전시 이후 앞으로 또 도전하고 싶으신 작업이 있으신가요?
앞으로는 제 개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세상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안으로 파고드는 생각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세상 사람들 생각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리고 회화작품을 기본으로 설치,영상 작품도 계속 선보이고 싶고, 그 밖의 다른 표현매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보고 싶습니다. 회화에서
설치로 표현매체가 확장되면서 제 사유의 과정 또한 확장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8. 앞으로 어떤 작가로 자리매김 하고 싶으세요?
저는 그림을 그리면서 ‘도무지 내 뜻대로 그려지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묘사력이나 표현력이 떨어진다고 느꼈던 어떤
그림이 때로는 아주 아름답게 느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종종 ‘그림이 내 마음대로 그려지면 무슨 맛인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 삶도, 제가 그리는 그림도
도무지 내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때문에 저는 앞으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넘치면 넘치는 만큼 제 생각 하나하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작가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이렇게 제가 경험하고 느낀 생각들을 계속 작품으로 만들어 가다 보면, 결국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제 생각이, 그리고 그런 제 삶이 하나의 흐름이 되어 확연히 보일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작은 그림들을 많이 그리려고 노력합니다. 제가 그린 작은 그림들이 그림으로서의 완전함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날 때까지 계속 그려보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제 삶도 완전함을 가지고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림이라는 것은 미술사적 이론이나 개념을 뛰어 넘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삶이 그림에 그대로 투영되어 그림 스스로가 말하는 부분이 더 크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