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y Artcelsi에서 기획한 '피어나는' 기획초대전 7인의 작가 중 두 번째 초대 작가의 전시가 3월14일(화)~
3월23일(목)까지 열렸다. 작업 안에서 이미 치유 받은 지금이 있기까지 치열했던 젊은 시간의 생채기들을 돌아볼 수
있게 된 오늘의 용기는 그녀의 것만은 아니라는 걸 전하고 싶다.
성숙의 지금이 있기까지 수없이 모색됐던 그녀의 청년기는 당신과 나의 초상이다. 박지영의 감응과 시선에 대한 담론을 들어본다.
이번 전시 주제가 ‘감응하는 시선’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시선’이란?
이번 전시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내재된 반응을 풀어놓은 작업들을 ‘감응하는 시선’이라는 타이틀로 다소 직접적이고 나의 힘듦,
불편함을 드러냈던 과거의 작업들이다. 나에게 ‘시선’이란 나와 대면한 타인의 감정이 투영된 ‘자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시각적 반응이 후각이나
청각적인 반응 감각보다 예민한 편이다. 그런 이유로 시각의 예민함이 ‘보이는’, ‘보고 있는’ 대상에 대한 ‘시선’의 집착을 만들어 냈다. 그 집착은
내가 그들의 반응에 ‘반응하는’ 불편한 성격 또한 만들었다. 그래서 시선은 곧 내게 불편한 감정이기도 하다.
여기서 ‘시선’을 단지 시각(vision)만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눈앞의 외형(실체)을 보는 동시에 개인의 감정과 경험으로 판단하고 받아드리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나에게 무엇을 본다는 건 판단의 혼란을 야기하며, 시선을 통한 ‘형상의 실체’, ‘그 속의 진실’, 즉 내면의 모습과 불일치되는 외면의 집착을
만들었다.
‘시선’의 시점은 어떤 면에서 여러 각도로 다룰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점에서 출발하였다. 작가 본인은 그 시선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형상의 실체’, ‘내면의 불일치’를 놓고 나의 감정적 반응이 시각적으로 어떻게 나오는 가에 대해서는 내면의 문제를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나에게 항상 달려있던 ‘시선’에
대한 나의 감정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를 감추거나 드러낼 때 전부를 보여주지 않다는 것, 그 자체를 스스로가 불편해 하는… 그렇게 찾고 풀어가다 보니 대면해야 하는
내 얼굴의 이면, 또는 타인의 얼굴, 그 안의 감정을 숨기거나 감춘 모습들… 그 속의 궁금함, 또는 덮어둠 등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들에 대해 추상적이기 보다는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도록 표현하려고 했다.
그렇게 내면을 끄집어내어 보여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그 ‘시선’의 불편함은 어디로부터 온 건지?
의식적으로나 학습적으로 보여주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안 좋은 면을 감추려는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 나를 방어하는 방법 중 하나가 상대방의 반응을 의식하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어떤 반응을 받아드릴 수 있게끔 예민하게 타인을 주시하고, 나의 감정을 조절하거나 또는 예상 범위를 벗어나는 다른 반응에 대해 차단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의
모습 일부를 숨기는 것 이였다.
그것은 한 부분을 감추고 살아야 했던 개인적인 아픈 사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나는 솔직하게 다 드러내놓지 못하던 어린 시절부터 타인의 관계 속에서,
그 관계가 시작하는 시작점 ‘시선’ 그것을 통한 교류, 소통의 불편함과 동시에 그것을 의식하는 나의 불편함 이 두 가지가 공존 해왔다. 생각해 보면 결국 ‘형상의 실체’ 감춰진
그 속의 진실이 들킬까 봐 두려워하는… 타인의 시선=내 감정의 불편함, 그것은 결국 타인의 시선에서 감정을 숨기는 나의 감정인 것이다.
억제 되어 감추었던 모습들일까? 그것을 만나게 되면서 진실 된 이미지(진짜 이미지)에 대하여 ‘외형(appearance)’이 담고 있는 여러 내면의 모습들을 찾아보는 작업하게
되었다. 나의 성향과 환경이 맞물리며 내게는 꽂힌 듯이 ‘시선’ 이라는 주제에 집중되고 그 위에서 시선은 또다시 더욱 나를 가두기 시작했다.
여기서 말하는 모습 중 일부를 숨긴다는 것은 이중성을 말하는 것인가?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소통에 관한 문제로도 볼 수 있는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드러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은 면만을 꺼내놓고 좋은 평가를 바라는 건 욕심이 아닌 그냥 사람의
마음인 것 같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거란 생각에 내가 이중적인 모습의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도 하면서 인간의 한 면에는 그런 것이 어느 정도는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한편이 존재하기에 아니라고도 대답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시선’은 곧 어떠한 대상의 만남을 의미한다. 그 ‘만남’은 시선을 통한 소통의 시작이다.
거기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시선’이라는 것으로 풀어가고 있으니, 결국은 이 주제는 소통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도 있다.
작가가 말하는 주제 속에서 ‘진짜 이미지’는 무엇인가? ‘시선’ 즉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감정의 모습인가? 아니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아인가?
그것에 대해 작업에서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는지?
외적인 형상과 내면의 모습의 간극, 그로 인한 진실한 이미지, ‘진짜 이미지’(본성에 솔직한, 숨김없이 보여지는 이미지를 본인은 이렇게 지칭하고 있음)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런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투영 또는 타인의 시각으로 인식된 감정 반응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드러난 자신의 이미지는 자신이 생각한 거 보다
왜곡된 혹은 위장된 모습으로 보여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주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에 대해, 나는 ‘진실한 이미지(진짜 이미지)’를 ‘시선’과 같은 맥락으로 놓았다. 타인이 투영된 ‘자신의 감정이면’을 결국 그 모습을
바라보는 ‘자아’로 놓고 보고 있는 것 이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타인과 소통을 하면서 보여지는 모습은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은 내면의 모습을 바라보게끔
하는 방법으로 붕대나 가면을 쓰고 있는 인물들로 나타냈다. 물론 다른 표현 가능성을 열어 둔다면 직접적이지 않고 감춰진, 숨긴 부위를 나타내지 않은 채 돌려서 표현을 할
수 있겠지만, 나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은 상처 받은 ‘자아’의 모습일 수도 있고, 그 부위를 숨겨서 다른 모습으로 보여지고 싶어 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감정의
모습’일 수도 있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 싶고, 마주하고 싶은 ‘진짜 이미지’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말하고 있는 ‘시선’은 타자에 의해 투영된 자신의 인 것 같다. 하지만, 공감을 얻기엔 개인적인 이야기를 본인의 시점으로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이에 대한 생각은? 그렇기에 작업에서 보여지는 붕대나 가면 등의 모습은 뭔가를 숨기고 있는 자신의 모습 같다. 이 모습들은 자화상인가?
나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을 해보았다. 타인과의 교류 안에서 서로의 감정을 읽을 수 없을 때 더 혼란스러운 가? 아니면 읽혀질 때 더 혼란스러운 가? 나는 타인과 마주하고
읽혀지는 감정에 더 힘들어진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해서라기보다는 그 뒤에 따라오는 이야기들에 대해 또는 어떤 것을 보이는 그대로 받아드려야 할 때
힘들어 하는 것 같다. 그래서 타인 감정을 의식하고 난 뒤부터 나는 나다움을 잃었다고 생각했었다. 나다움을 잃었다고 말해야 할지, 감췄다고 해야 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또 그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한 부분을 감추고 대면하는 나의 모습은 솔직하지 않은 모습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도 어찌할 방법을 못 찾은 때, 나는 그 모습을 그냥
‘나’로써 받아드렸다. ‘나’ 라고 인정하게끔 나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타자에 의해 투영된 나의 모습이며, 어쩌면 솔직한 감정이기도 하다. 작업을 하는 작가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을 다 표현하려고 하기도, 하지 않으려고도 할 것이다.
공감에 대해서는 나에게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는 소수라도 있을 것이라고 여기며 개인적인 감정에 대한 것을 일반화 시키려고 하진 않았다. 단지 여기서 우리는 서로를 의식하며
보여주고 싶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은 한다. 이런 부분에서 조금은 공감을 갖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누가 타인의 감정과 소통을 단절한 채로 자신에 빠져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작업을 하는 입장에서 어떤 부분을 분명히 이야기 하고자 할 때, 개인적인 시점에서 풀어주는 것이 좋다고 보는 편이다. 느끼고 있는 감정을 내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통해 할 수 없진 않은가? 그래서 나의 작업에서 나온 인물의 모습은 각자 힘든 부분과 감추고 싶은 모습을 나를 통해 대변하는 어떤… 그 어떤 것이므로
그것들을 ‘자화상’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하지만 나의 한 부분, 또는 전체를 덮었던 상처, 보이기 싫은 부분을 나를 통해 풀어놓았기 때문에 자화상으로 말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나의 작업들은 자화상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붕대나 가면의 모티브는 흔히들 아픔, 상처 또는 진실의 여러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을 때 쓰이는 대표적인 표현 방법이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직접적이고 당연하여,
불편함이 바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 속내(내면)에는 여러 모습과 다 말하지 못한 어느 한 부분들…그것을 작업을 통해서 감춰가며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도록…
그것을 통해 나 또는 우리는 조용하지 않았던 내면을 대면하고 볼 수 있도록 붕대나 가면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대신 누군가가 자신의 용기내지 못했던 속내를 꺼내준다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고 믿는다. 끊임없이 나를 대면하는 일, 그것이 내가 작업을 통해 꺼내어 건드려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업을 할 당시 나의 성격은 예민함과 우울감이 극에 달아올라 있었다. 본래 성향과 상황이 더욱 나를 감추거나 가리거나 하는 등의 혼란을 만들었던 시기…뭐랄까…
잘(?) 포장되어 자라온 환경에서 학습된 성향, 끊임없는 교류와 소통 그리고 그 안에서의 나의 모습을 선택하는 것에 대하여 프랑스 유학 후 돌아온 나는 어떤 모습을 더욱
선택하여 내보이며 풀어나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리고 주변의 관심, 혹은 기대심 등이라는 시선이 나를 더 압박과 두려움이란 감정에 갇히게 만들었다.
누구도 만들어준 것이 아닌 항상 나 자신의 문제였기에, 가장 힘든 때 더 나를 마주하고 본 것 같다. 한 개인이 단호할수록 뭔가 다르거나 모가 나있을수록 그 개인은 점점
사회와 멀어지거나 부딪히는 일이 많아진다는 걸 알기에 당연하지만 편하지 않게 받아 드려야 하는 것들, 속에만 담아 둬야 하는 것에 대한… 불편한 소통과 교류 그것의 시작점
‘시선’에 대한 내면(內面)… 이것은 아직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하는 계속되는 고민 위에 놓여있다.
작업을 보면 대부분의 색감이 블랙이나 화이트를 베이스로 하거나 그레이톤 이다. 이것 또한 의도된 작가의 감정일까?
나는 누군가와의 대화에서나 질문들에 대하여, 감정표현을 누르려는 것인지 자주 ‘모르겠다’라는 모호한 표현을 자주 쓴다. 확실한 대답을 내놓는 다기 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맞을 수도 있다는 대답이다. 어떤 공격에 대한 회피나 방어, 대비하기 위한 모습 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하는 작업에는 나의 색, 나와 맞는
내 감정은 무채색으로 생각하며 그것을 나의 일부의 표현으로 쓰고 있다.
작가들 대부분은 자신의 작품과 맞는 색을 선택하여 작업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작업 안에서 나오는 형태들이 어찌 보면 외형을 대면하고 드러내기 위함이면서 또한 내 감정을
표현 할 때의 색은 대화에서 자주 사용되는 ‘모르겠음’이라는 모호함의 느낌, 나로서는 그것을 모노톤으로 대변하고 있다. 작업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상처나 숨김의 표현을
담으면서 방어적으로 ‘나도 잘 모르겠다’라는 나의 마음을… 한 켠으로 색으로 남겨두는 또 하나의 나의 감정인 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작업으로 풀면서 어느 정도의 공감하길 바라고 있는지?
나의 작업을 불편하거나 무섭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림을 보고 나니 내게 어둡고 슬퍼 보인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공감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공감할 부분이
그들과 맞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작업하는 입장에서는 보여줄 때 완벽한 공감은 힘들 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공감을 얻기 위함을 염두하며 작업을 한다면 나에게 작업이
불편함과 답답함을 줄 것 같다. 예술작업을 통해 내 감정을 발현했을 때, 생각하였던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반응은 나의 몫이긴 하지만, 내놓기 전에 내가 작업하면서
그것까지 생각 하려면… 솔직히 그건 아직 까진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 표현을 하는 것이 나에게 맞는 것 인지만을 생각 하고 싶다. 보기 좋고 따듯함 혹은 화려한 작업을 보았을 땐 나에겐 거리감이 생긴다. 공감이 되지 않는 게 아니라
조금 다른 언어와의 소통을 해야 하는 어려움 같은 기분이랄까? 나의 작업처럼 내면을 들추어 낸 나에 대하여 상대에게 다시 나에 대해 되묻도록 혹은 스스로가 그 내면이 되어
생각하도록 하면 얼마나 좋겠나…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좋다. 그렇기에 예술은 매력적이다. 혼자 얘기하는 이도 예술가고 소통하는 이도 예술가 아닐까… 보여줄 사람들의 선택을
정해놓지 않은 채로 드러내놓고 소리 지를 수 있으니…
본인에게 예술이란? 작업이란?
시간이 좀 더 흘러 예전의 나를 꺼내놓게 바라보게 된다면 물어보고 싶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힘들게 했는지, 그것을 뛰어넘고 바꾸려고 노력한 적은 있었는지에
대하여… 좁은 시선, 틀 안에 갇혀 그것을 두려워했던 나에게 그것도 나였고, 현재의 나도 ‘나’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덤덤하게 작업 속에서 편한
나를 보여주고 싶다.
나는 작업하는 시간이 좋고, 작업하는 내가 좋고, 그 모습을 담고 있는 공간이 좋다. 그 시간만큼은 언제나 나는 편안하고 자유롭고 ‘나답다’. 이렇듯 나에게 작업이란,
내게 예술이란. 을 묻는다면, 나를 꺼내놓고 나를 해부하고, 나를 바꿔보고, 나를 그냥 이대로 받아드리고, 그저 멍하니 쳐다보고 있어보기도 하며, 나를 미워도 해보고,
나를 측은해 하면서 그 감정을 찬찬히 공들여 들여다보며 그것을 표현하는 공간과 시간, 그 안에서 타인의 감정도 이해할 수 있을… 이 모든 것을 같이 풀어보려고 하는
자신과 대화하는 책과 같다. 누군가 이것을 예술작품이라는 시각예술로 만났을 때 마주한 작품을 통해 본인만의 감정의 책을 갖게 되지 않을까...
예술이란, ‘펼쳐놓은 자신의 감정의 들여다보는 책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이렇듯 나의 작업을 보게 되는 그 누군가는 자신을 꺼내놓고, 스스로 조차도 보려 하지 않던
다른 모습도 마주하게 되면서 위로 또는 후련함, 또는 미워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보기도 하는 여러 모습을 만나가기를 바란다.
이번 전시는 나에게 의미가 깊다. 첫 개인전이며 기획초대전이다. 갤러리 아트셀시의 마련해준 이번 기획초대전의 제목처럼 ‘피어나는’ 전시를 시작으로 앞으로도 나를
열어내고 피어내면서 내가 벗어나려고 했던 타인의 시선을 한 면으로는 즐기며, 그 ‘시선’ 위에서 울고 웃으며 타인과 공감할 수 있는 고민을 작업으로 풀어보고 싶다.
박지영 (PARK JIYOUNG)
2013 프랑스 파리1대학 Panthéon Sorbonne 조형예술전공 Doctorat 수료
2006 프랑스 파리1대학 Panthéon Sorbonne 조형예술전공 Master2 졸업
2005 프랑스 파리1대학 Panthéon Sorbonne 조형예술전공 Maîtrise 졸업
2003 프랑스 파리1대학 Panthéon Sorbonne 조형예술전공 Licence 졸업
개인전
2017 '피어나는'전 (기획 초대)_ '감응하는시선'전, 갤러리 아트셀시, 서울
그룹전. 기획초대전
2016 'Adieu 2016'전, 갤러리 아트셀시. 서울
'이 언니들을 조심해라'전, 갤러리 아트셀시, 서울
'5월의 꽃향기'전, 경민 현대미술관, 의정부
2015 '시각과 변화'전, 영아트 갤러리, 서울
2014 'Warm heart'전, FE 갤러리, 서울
'image rémanente 잔상 놀이'전, The cut, 서울
2009 '쇼.쇼.쇼' 초대전, 갤러리 믿음, 안산
'100 Cubes'전, 갤러리 biim, 서울
'돌아와 돌아온'전, 파란네모 갤러리, 서울
2001 '어린이.놀이.조각' 기획전, 성남 문화센터, 성남 아트페어
아트페어
2016 제4회 대전 국제 아트쇼, 대전 무역전시관, 대전
Withartfair2016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서울 파르나스,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