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4. 04. SAT ~ 2020. 04. 17. FRI
바닷가마을을, 고향을, 존재의 원천을 그리워하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작가 허동백은 러시아 사할린주 코르사코브시의 바닷가마을에서 태어났다. 현지 말로 까레이스키, 우리말로 고려인 2세 작가다. 2차 세계대전에 패망한 일본이 자국민을 실어내기 위해 배를 보내왔지만,
한국인을 위한 배는 끝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사할린으로 강제이주 당한 부모세대는 현지에 남겨졌고, 망향의 한을 달래며 항구마을에 정착했다. 이후 안산시에서 장기임대형식으로 아파트 건설 부지를
제공하게 되었고, 그렇게 형성된 상록수마을에 사할린 동포들을 위한 고향마을이 건설되었다. 2000년에 우여곡절 끝에 작가의 부모는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작가 역시 러시아에서 교수로서의 안정된
생활을 포기한 채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한국으로 왔다. 지금도 작가의 가족은 러시아 현지에 살고 있다(작가의 신상에 대해서는 버질아메리카 22호, 2012년 2권 참조).
작가의 신상을 정리해본 것이지만, 작가의 삶은 소위 디아스포라 곧 강제이주정착민의 축도로 봐도 될 전형적인 경우를 예시해주고 있다. 예술론에서 보면, 현실(그러므로 삶)과 예술은 별개의 영역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런가하면 예술은 현실의 반영인 것인 만큼 별개의 영역일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한쪽은 맞고 다른 한쪽은 틀리다고 보기보다는, 예술을 보는 다른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렇다면 작가의 경우는 어떤가. 작가의 신상배경에 대한 사전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작가의 그림을 보면, 얼핏 현실을 반영한 미술(이를테면 현실주의미술) 같지는 않고, 초현실주의적
비전에 빗대어 자신만의 판타지를 열어놓은 그림으로 보이고, 그리고 그렇게 자신만의 독창적인 형식을 예시해주는 경우로 읽힌다.
그렇담 작가가 겪었을 지난한 삶이며 치열했을 현실인식은 그림과는 상관없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작가의 그림은 현실주의미술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난한 삶이며 치열한 현실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경우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다른 방식을 위해 초현실주의적 비전을 도입하고 각색한(자기화한) 경우로 보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작가의 작업이 갖는 특정성이 있다. 바로 초현실주의적 비전에 빗대어 자신의
삶을 반영하고 현실인식을 투사한 그림이다. 그런데 왜 초현실주의적 비전인가, 초현실주의적 비전에 어떻게 현실을 반영하는가를 밝히는 것이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는 일의 관건이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의 강령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인간을 욕망의 동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개별인간은 필연적으로 반제도적이고 반사회적이다. 욕망은 자기를 실현하려하고,
제도는 그 욕망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쩜 개별욕망을 억압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것에 모든 건전하고 건강한(?) 제도의 성패가 달려있다. 그렇게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 억압된 욕망, 무의식으로
추방된 욕망이 우회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꿈이고 예술이다. 여기서 꿈은 억압된 현실을 포함하므로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 지극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렇게 초현실주의를
매개로 한 예술은 현실주의와는 다른 방식으로 현실을 반영한다. 바로 현실에서 좌절된 욕망, 억압된 욕망, 무의식으로 추방된 욕망을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로 보는 것이다.
그렇담 작가가 예시해주는 무의식의 거울에는 어떤 억압되고 좌절된 욕망이 비쳐 보이는가. 게오르그 짐멜은 현대인의 징후며 증상으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든다. 여기서 고향은 지정학적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보다는 존재감 곧 존재의 원천에 대한 감정 그러므로 뿌리의식을 의미한다. 바로 현대인은 존재감이며 뿌리의식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며, 그 징후며 증상을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작가의 그림에는 이런 까레이스키의 고향에 대한 상실감이 있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 앞서 작가는 사할린의 바닷가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는 유독 바닷가 풍경이 많다.
지정학적 장소로서의 고향을 그린 것이고, 정신적인 거소로서의 고향을 그린 것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아득한 현실 저편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러므로 망향의식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에
빈번한 바다는 경계에 대한 메타포로 보아야 한다. 현실과 비현실, 현실과 초현실, 꿈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세계를 가름하는 경계로 보아야 한다. 그 가시적이고 비가시적인 경계 앞에 서서 작가는 존재가
유래한 원천을 그리워하는 것이며, 그 그리움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육지의 유실을 막기 위해 설치해놓은 목책이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목책은 해수와 해풍으로 패이고 너덜너덜해졌다. 작가는 그렇게 패이고 너덜너덜해진 부분에다가 하늘을 우러르는 사람들의 형상을
빗어놓았다. 목책이 패이고 너덜너덜해질 만큼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만큼 깊어진 사람들의 상처를, 망향의식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아로새겨 놓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시간새>가 있다. 시간새? 작가가
만든 조어다. 얼핏 보면 그저 아득하게 멀리 보이는 수평선을 경계로 파문이 이는 바다와 뜬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이 서로 조응하는 풍경 같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뜬구름이 만든 패턴이, 그리고 파문이 그려
보이는 패턴이 거대한 새의 날갯짓 같다. 그렇게 하늘과 바다를 온통 뒤덮을 만큼 거대한 새가 풍경 속을 날아가고 있다. 그렇게 풍경이 새가 되었다. 풍경이 아득해질 만큼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마침내
풍경이 새가 된다. 나는 비록 경계 저편으로 건너갈 수 없지만, 대신 새를 그리움의 메신저로 보낼 수는 있다. 그래서 시간새다. 그리움으로 축적된 세월이 한 마리 새로 화신한 것이다. 그리고 거대한
고래가 있다. 사실은 구름이 만든 형상이다. 물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구름고래는 하늘을 헤엄쳐 경계 저편으로 갈 수가 있다. 경계너머로 그리움을 대신 보낼 수가 있다.
작가는 그렇게 초현실주의적 비전을 빌려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망향의식 그러므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놓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모티브가 구름이다. 구름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 그 형태가
가변적이고 변화무상하다. 초현실주의적 비전이 꼭 그렇다. 초현실주의적 비전이 열어 보이는 형태 역시 가변적이고 변화무상하다. 바로 변태야말로 초현실주의적 비전의 특징이랄 만하다. 상상력(엄밀하게는
무의식적 욕망)이 매개가 되면서 현실을 임의적이고 자의적으로 변태시키는 것이다. 현실을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사물의 전치, 곧 사물의 배치(그리고 관계)가 달라지면 그 의미 또한 달라진다. 그렇게
형태도 확장되고 의미도 확장된다. 그러므로 세계를 확장시키는 방법이다.
앞서 작가는 바닷가마을이 고향이라고 했다. 그래서 작가의 그림에는 유독 바닷가에서 유래한 소재들이 많다. 조가비, 소라 같은 소재들이다. 소라 역시 망향의식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를테면 내 귀는
소라껍데기,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장 콕토의 시에 의해서도 뒷받침되는 부분이다. 소라껍데기는 꼭 귀처럼 생겼다. 그래서 소라껍데기를 보면 꼭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귀를 보는 것
같다. 여기서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는 시구는 바닷소리에 실려 왔을, 밑도 끝도 없는 바다 저편에 있을, 그리고 종래에는 바다마저 유래했을 존재의 원천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며, 그 그리움의 대상이며
의미가 망향의식과도 통한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소라 그림을 <소라의 꿈>이라고 명명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꿈은 초현실주의적 비전이 자기를 열어놓는 장이며, 현실에서 억압된 욕망이 우회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장이다. 그렇게 작가는 존재가 유래했을 원천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소라의 귀를 빌려 듣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구름과 초현실주의적 비전은 서로 통한다고 했다. 구름이 만드는 형상은 정해진 형태가 따로 없다고 했다. 가변적이고 비결정적이라고 했다. 초현실주의적 비전이 꼭 그렇다고 했다.
초현실주의적 비전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형상으로 현실을 변태시키는데, 그걸 변태성이라고 했다. 그렇게 조가비가 양쪽 날개를 팔랑이는 나비 같고, 조가비의 굴곡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구름으로
확장되면서 풍경의 일부가 된다. 여기서 나비는 아마도 형태적 유사성에 착안한 것일 터이고, 그 유사성이 초현실주의적 비전과 통한다. 그리고 그 자체 현실 저편으로 그리움을 실어 보낼 메신저의
또 다른 한 경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리움은 조가비를 나비로 변태시키고, 구름으로 변태시키고, 종래에는 스스로 풍경이 된다. 그리움이 녹아든 풍경, 그리움이 만든 풍경, 그리움의
화신 같은 풍경이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에서 확인되는 특이한 점으로 셀 구조를 들 수 있다. 작가의 그림은 사실 셀들이, 모나드들이, 단자들이, 요새로 치자면 픽셀이 집적되면서 형상을 만든다. 셀들이 모이는 여하에
따라서 조가비도 되고, 나비도 되고, 구름도 된다. 가변적이고 변태적인 형상구조를 가지고 있고, 그 형상구조가 초현실주의적 비전의 그것과도 통한다. 여기서 셀들은 아마도 그리움의 입자들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마침내 그리움은 공기가 되었고, 그 공기가 흩어지고 모이면서 이러저런 형상을 만들고, 작가가 상상하는 세상을 빗어낸다. 그렇게 작가는 자기 내면에 살아 숨 쉬는 바다를 그렸고, 그리움의
화신 같은 풍경을 그렸다. 존재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원형의식을 그렸다. 국내에선 그 경우가 별로 없는, 환상파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KHE DON BEK 허동백
B.F.A. Graduate from Dept. of Applied and Decorative Arts. Irkutsk Art College, Russia
1976-2000 Korsakov Art School, Russia. Art Department. Teacher
Solo Exhibition
2020 Gallery Artcelsi, Seoul
2019 Art Ulsan 2019, Taehwa-gang Project, Ulsan
2015 Park Avenue Gallery, Los Angeles, USA
2015 Wee Gallery Phoenix, USA
1999 Exhibition Korsakov, Sakhalin Regional Museum, Russia
1998 Exhibition of Korsakov artists in Wakkanai, City Hall, Japan
1991 Korean Artists in Sakhalin, Yuzhno-Sakhalininsk, Russia
1985 ⅡExhibition of Korsakov artists Korsakov, Russia
1983 ⅠExhibition of Korsakov artists Korsakov, Russia
1980 Exhibition of sakhalin Region artists–Teachers Art schoolsin, Yuzhnosakhalinsk, Russia
Group Exhibition
2019 Freedom 2019, Yangpyeong Art Museum, Yangpyeong, Korea
2019 Freedom 2019, Fukuoka Asian Art Museum, Fukuoka, Japan
2018 Art Show Seoul, Coex. Seoul
2018 Busan International Art Show, Bexco, Busan, Korea
2017 PLAS. Coex, Seoul, Korea
2017 Philoprint Exhibitionat Insa Art Space, Seoul, Korea
2017 GIAF 2017, CECO, Busan, Korea
2016 PhiloprintExhibition of Korean Contemporary Prints. L.A, USA
2016 Korea Professional Artist Mall Festival, Art Center. KPAA. Seoul, Korea
2015 Exhibition at Wee Gallery. Phoenix, USA
2015 Exhibition at Park Avenue Gallery. L.A, USA
2014 The 28th Philoprint, Hyehwa Art Center, Seoul, Korea
2013 Vergil America Special Project.Blowing Flags in San Bernandino, USA
an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