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 혹은 흔적 그로부터의 감각하고 기억하게 되는 것들에 대하여



사이아트연구소 이승훈

박지영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작업들에서는 주로 나무의 밑동과 나이테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나무에 대한 이미지들은 단순히 나무를 그려낸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들이 담겨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먼저 작가가 작품 명제에서 ‘어느 초상’,‘자화상’,‘가족’과 같은 낱말들을 사용하는 점에서 알 수 있는데, 이와 함께 작가가 그려낸 나무 이미지들이 화면에 배치된 상황을 보아도 이 형상들은 결국 나무 그 자체와는 다른 의미, 즉 사람에 대한 이미지이고 그 이미지들에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작가는 이 작업들이 자신 가족의 병환과 관련된 개인사로부터 시작 되었음을 이야기 한다. 이는 가족이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든 겪게 되는 생로병사의 애환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한 개인이 오랜 기간 구체적 현실로 당면하게 되었을 때에는 그 오랜 시간이 언어로는 기록할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에게는 다른 언어, 즉 그림을 그려내는 것과 같은 방법이 필요했고, 자신의 내면 세계를 응축해서 대신 표현해줄 수 있는 이미지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 결과 작가가 선택하여 그려내게 된 이미지가 나이테와 같은 나무의 형상이었던 것으르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과 관련하여 나무의 나이테와 나무의 껍질은 시선이 머무는 곳이며 그것을 그려가는 과정에서는 그림에 자신의 과거 시간 속 기억과 감정들까지 담기게 되는 느낌을 갖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나무와 나이테를 그려가는 드로잉 작업 과정에서 나이테의 굴곡은 떨림과 진동과 같은 감각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보이며, 수많은 나이테를 그려내는 반복 작업은 자신의 정서를 담을 정도로 정신을 집중하게 만들고 오히려 편안한 마음까지 갖게 해 주었던 것 같다. 작가에게는 나이테와 나무를 그려가는 과정이 일종의 수행적 행위가 되었고 내적인 치유 경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나무의 나이테에 함축되어 있는 시간에 대한 형상이 시간과 기억으로 채워져 있는 인간의 모습과 닮아 있음을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을 본다는 것, 거기에 시선이 머물게 된다는 것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선이 머물렀던 인간에 대한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테처럼 쌓이고 쌓이면서 그 인간의 인격과 같은 하나의 정체성처럼 보이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무처럼 인간에게도 표피는 시선과 감각이 마주치는 곳이 되며, 결과적으로 감각의 역사가 축적되는 장소가 된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인간의 구체적 모습을 그려내는 것 대신에 인간의 외형 이면에 품고 있는 기억과 감각이 축적되어 있는 나무와 나이테 이미지가 대신한 인간상을 그려내게 되었을 것이며 또한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찰하는 지점에 대해 작업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흘러가면 생생했던 기억이나 감각들마저 점차 잊혀질 수 있지만 그 기억이나 감각과 관련된 어떤 흔적들을 만나게 되면 그 잊혀진 것처럼 느꼈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소환되기도 한다. 박지영 작가는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인간에 대해, 기억과 감각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을 잊게 만드는 시간에 대해 작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이테처럼 쌓인 흔적들을 그의 캔버스에 쌓아 올리면서 자신이 경험했던 사건과 상황 그리고 감정들에 대한 기억을 자세히 기록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의 작업을 보면서 누구도 그가 경험한 구체적인 것들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작가가 경험하게 되었던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들에 대한 감정과 기억에 대한 느낌들은 그의 작업에서 어떤 구체적 장면을 묘사하는 것보다 깊이 있게 공감할 수 있는 하나의 흔적으로 그의 작업 가운데 발견 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인 형상으로부터 감각하게 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겹들이 상징하고 있는 시간의 두께는 그것을 보고 상상하게 되는 관객들의 내면에서 어쩌면 점차 더 강하게 증폭되어 다가올 것 같다. 그러므로 박지영 작가의 작업은 무엇을 그려냈다기 보다는 자신이 경험하고 감각하였던 시간, 혹은 반복된 작업을 하며 지나간 시간으로부터 그 흔적을 나무의 나이테처럼 캔버스에 남겨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는 결국 이러한 흔적을 통해 시선을 그의 작업에 머물도록 함으로써 그로부터 상상하고 읽어갈 수 있는 것들을 그의 작업에서 만나게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누구인가, 내면의 해부학



고충환 (Kho, Chung-Hwan 미술평론)

예술은 감각을 통해서 세계와 만나는 기술이다. 감각을 매개로 세계를 읽는 것인데, 특히 조형예술은 여타의 감각 중 시지각과 관련이 깊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보는가,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재현 하는가가 조형예술을 지지하는 두 축이다. 시각과 재현, 줄여서 말하자면 시각적 재현인 것. 그만큼 시각 곧 본다는 것은 조형예술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의 문제에 천착한 박지영의 회화는 조형예술의 핵심에 연관되고 기본에 연동된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여기서 본다는 것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고 그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보는 동시에 세계며 사물대상을 읽고 느끼고 판단하는 총체적 인식행위이다. 본다는 것은 말하자면 인식론적 행위인 것이다(시각이 곧 인식인 것). 여기서 작가의 작업이 예사롭지 않은 것은 그 시각의 대상, 그 봄의 대상, 그 인식론적 행위의 대상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인 점이다. 여기서 나를 대상화하는 것은 곧 나를 보는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것이다. 내가 나를 본다? 내가 나를 대상화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나, 자아, 주체, 에고의 실체를 묻고, 그 실체가 얼터에고, 분신, 아바타, 그리고 도플갱어(나와 나의 그림자? 주체와 주체의 그림자?)로 분화되는 과정을 따져 묻는다. 그러므로 작가의 작업은 전형적인 자기반성적 작업을 예시해주고, 작가는 그 작업에 성실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천착한다. 그건 비록 작가 자신에 한정된 것이고 작가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 공유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 천착한 작가의 작업은 보편성을 얻고 공감을 얻는다.

작가의 작업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 것이란 점에서 심리적이고 내면적이다. 심리 혹은 내면의 해부학이라고나 할까.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작가의 그림을 보면 특히 눈이 두드러져 보인다. 시각 곧 본다는 것의 문제를 눈을 통해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 속엔 수많은 눈들이 있다. 그런데 그 눈들의 생김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물고기 형태다. 눈도 유선형이고 물고기도 유선형이다. 아마도 그런 형태적 유사성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림은 마치 물고기 형태의 눈들이 물속을 자유자재로 유영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유영하는 눈들 사이에 작가 자신이 위치한다. 작가는 그렇게 가만히 서서 유영하는 눈들을 쳐다본다.

그렇다면 이 물속은 무엇이고, 그 물속을 유영하는 눈들은 무엇인가. 물속은 자신의 무의식이다. 그리고 눈들은 또 다른 나(억압된 나, 나를 질책하고 부끄럽게 하는 나, 나를 책망하는 나)이며, 내가 무의식 속에 불러들인 타자들(나를 억압하는,나를 질책하고 부끄럽게 만드는, 나를 책망하는)이다. 타자도 나를 책망하고 나도 나를 책망한다. 바로 내면의 타자(내 안의 타자)이며 초자아인 것. 그렇게 작가는 지금 사실은 자신의 내면을 쳐다보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쳐다본다? 자기가 자기를 쳐다본다? 이중적이고 분열적이다. 나는 쳐다보는 나와 나에 의해 쳐다보이는 나로 분리되고, 주체와 객체로 분열된다. 누구든 자기반성적 경향(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경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면 동시에 이런 자기분열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작가의 눈 그림은 주지시킨다.
이런 자기분열 상태를 보다 일반적인 경우로 치자면 각각 아이덴티티와 페르소나로 정식화할 수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페르소나는 가면주체를(페르소나의 어원이 가면에서 왔다), 그리고 아이덴티티는 그 가면주체에 의해 억압된 주체를 말한다. 억압된 주체? 바로 욕망적인 주체, 야성적인 주체, 야생적인 주체, 본능적인 주체, 자연적인 주체, 원초적인 주체다. 프로이드는 개별주체가 필연적으로 반사회적이라고 했다. 자기를 실현하려는 개별주체의 욕망이 공공연하게 사회(타자)에 의해 억압되기 때문이고, 개별주체는 그 억압을 스스로 내재화하기 때문이며, 그 내재화에 연유한 거세불안을 재차 내재화하기 때문이다. 거세불안? 바로 나는 언제든 사회로부터 거세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며, 타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다. 흔히 현대인의 징후적인 증상으로서 상처와 불안을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면을 쓴다. 상처 받기가 두렵고 불안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이다. 상처와 불안은 약점이다. 그걸 타자에게 들킨다는 것은 치명적이다. 그래서 가면을 써야한다.

작가가 그려놓고 있는 무의식의 방에는 이런 가면들이 비치돼 있어서 나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가면들을 바꾸어 쓸 수가 있다. 무표정한, 그래서 아무런 감정정보도 내어주지 않는 가면들, 웃는, 그래서 나를 호의적인 사람으로 착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가면들, 그리고 종래에는 얼굴 자체가 가면이 돼버린 가면들이다. 얼굴 자체가 가면이 된? 가면을 자꾸 쓸 버릇하다보면 가면과 자신과의 동일시(정체성 혼란)가 일어나고, 내가 상실되는 일(정체성 상실)이 일어난다. 작가의 가면그림은 바로 이런 현대인의 증상, 이를테면 상처와 불안, 정체성 혼란과 정체성 상실을 주지시킨다. 여기에 작가의 그림에 보이는 지배적인 색감, 이를테면 대개는 검정색과 회색 사이에 걸친 모노톤의 색감이 이런 현대인의 증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색채감정으로 보인다. 그렇게 작가는 상황논리로 그리고 색채감정으로 자기를 그리고 현대인을 그려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런 가면그림은 온몸을 특히 얼굴 부위를 집중적으로 붕대로 감싼 그림들로 변주된다. 그 속을 볼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 속을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자기감정을 나아가 자기 자신을 그 뒤에 숨긴다는 점에서 붕대는 가면과 그 의미가 하나로 통한다. 이처럼 붕대는 가면의 또 다른 변주된 한 형식이면서, 동시에 현대인의 이중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곧 상처를 숨기면서(나는 결코 너의 상처를 볼 수도 알 수도 없다) 동시에 상처를 드러내는(붕대 자체가 여하튼 상처를 증언하는) 것이다. 분명 상처가 전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상처를 볼 수는 없다? 상처 없는 상처? 실체 없는 상처? 다만 전시를 위한 상처? 가면과는 또 다른, 현대인의 자기보호본능이 발현된 것이며, 무의식의 방어기제가 실현된 경우로 볼 수도 있겠다. 이를테면 나는 쉽게 상처 받는 사람이니까 상처 줄 생각을 하지 말라는 주문과 같은.
사실을 말하자면 작가는 자신의 그림 속에 어느 정도 상처의 실체를 암시해놓고 있다. 왜곡된 얼굴과, 이목구비가 개연성 없이 마구 재구성된 얼굴, 그리고 무슨 메두사의 뱀 머리처럼 머리칼을 풀어헤친 얼굴에 나타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가 그렇다. 이런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는 말하자면 일그러진 욕망이 외화 된 경우로 보인다. 왜 일그러진 욕망인가. 욕망이 억압된 것이고, 그렇게 억압된 욕망이 상처로서 내재화된다. 그러므로 욕망이 없으면 상처도 없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욕망의 동물이다(프로이드). 욕망을 실현하도록 태어났으나, 정작 그렇게 타고난 욕망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그렇게 상처를 내재화하도록 운명 지워진 것에 삶의 이율배반이 있고 부조리가 있다. 작가의 그로테스크한 그림들은 바로 그 삶의 이율배반과 부조리를 주지시킨다. 이런 일련의 작가의 그림들은 일종의 신체풍경으로 부를 만한 개연성을 가진다. 그 중 근작에서 작가는 일종의 눈알풍경으로 부를 만한 또 다른 풍경을 예시해준다. 그동안 그려온 눈 그림에서 눈 형태를 삭제하고 수정체에 해당하는 원형의 눈알만을 취해 그린 것이다. 유성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눈알들, 마치 길을 잃은 듯 건물 사이사이로 서성이는 눈알들, 눈 속에 파묻혀 설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눈알들이 낯설고 생경한, 이질적이고 비현실적인,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신체풍경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줄 수는 있다. 그리고 눈알이 아니라면(이를테면 단순히 추상적인 패턴을 그린 것이라면) 굳이 그로테스크하게 어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여하튼 눈알을 소재로 그린 이 일련의 근작에서 느껴지는 낯선 느낌은 말하자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주체에 내재화된 일그러진 욕망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이 일련의 그림들과 함께 작가는 각각 사진과 테라코타를 이용해서도 자기 내면을 탐색한다. 예의 눈을 강조한 경우들도 그렇지만, 특히 얼굴을 소재로 한 사진들이 흥미롭다. 자신을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즉석 사진) 위에 덧그리기도 하고, 이러저런 도구를 이용해 긁어내기도 하면서 얼굴 위에 비정형의 스크래치를 만들고 얼룩을 조성한다. 그리고 종래에는 그렇게 조성된 얼룩이며 스크래치에 얼굴의 전체 혹은 부분이 가려지고 지워지고 왜곡되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 사진들은 다 뭔가. 얼굴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얼굴을 드러내고 감추기를 반복한다? 얼굴을 긍정하고 부정하기를 반복한다? 짐짓 꾸민 얼굴(페르소나) 이면에 가려진 진짜 얼굴, 진정한 얼굴, 맨 얼굴(아이덴티티)을 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작가는 얼굴이라는 대지 위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굴하는 고고학자 같다.
그리고 별로 크지 않은(거의 손가락 마디만한?) 테라코타 두상들이 주목된다. 두 개의 얼굴이 한 몸인 얼굴, 얼굴 속에 또 다른 얼굴이 들어있는 얼굴, 앞 뒤 얼굴이 합체돼 앞 뒤 쪽을 다 볼 수 있는 얼굴,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그래서 저마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얼굴, 그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을 뿐, 어떤 알 수 없는 비정형의 덩어리에 가까운 얼굴들이다. 평범한 얼굴들이 하나 없고 멀쩡한 얼굴들이 하나 없다. 도대체 이 얼굴들은 다 뭔가. 그 자체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주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주체에 내재화된 일그러진 욕망의 또 다른 알레고리로 와 닿는다. 그리고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각각 그림과 사진과 테라코타를 매개로 주체의 그림자들이며 주체의 반영들이 정박되는 지점을 열어놓고 내면의 지도를 열어 놓는다.